일하기 좋은 나라, 네덜란드에서 살아가기

일하기 좋은 나라, 네덜란드에서 살아가기
Photo by Glenn Carstens-Peters / Unsplash

본 글은 제가 처음으로 돈을 받고 기고해 본 글입니다. 독립잡지 '나이이즘'이라는 잡지의 2호(2019년 봄 발행)지에 실린 글입니다. 잡지 발행된 지 시간이 오래 지나 제 블로그에 원문을 올려봅니다. 올해 초에 이미 제 블로그에 써놓은 글과 비슷한 내용의 글이긴 합니다.

인생 버킷리스트에 도전하다

“해외에서 일하고 살아보는 것”.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상위권에 항상 있던 바람이었다. 1980년대 말,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의 미국 MBA 수학으로 2년간 미국에서 살아볼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 입장에선 늦은 나이에 간 유학이었기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지만, 나는 워낙 어렸기 때문에 그 시절에 대해선 밝은 기억만 있다. 위의 바람이 버킷리스트에 항상 있었던 이유다. 

30대 중반에 결혼을 한 후 아이를 출산했다. 대기업과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에서 10여년 간 일하면서, 한국에서 일과 삶(특히 아이가 있을 때)의 균형을 잡는 게 쉽지 않다고 느꼈다. 또한, 그 와중에 미세먼지가 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가까운 가족 중 두 분이 폐질환으로 삶을 마감한 가족력이 있기에, 미세먼지 이슈는 나에겐 ‘생존'의 문제였다.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회사에서는 나름 성과도 잘 내고 있었고, 더 잘 하고 더 많이 벌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내 몸이 성치 않고, 가족과의 시간 -- 특히 아이와의 시간 -- 이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이 안되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두 가지 옵션으로 이민을 준비했다. 한 옵션은 내가 쌓아온 많은 것을 포기하고 다시 학업부터 해야 하는 옵션이었고, 다른 옵션은 당시 다니던 회사의 미국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비자였고,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비자 발급 자체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둘 다 미래가 막연한 옵션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네덜란드에 있는 헤드헌터가 내게 연락을 해왔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글로벌 온라인 여행 예약 서비스 회사로의 이직을 도전해보지 않겠냐는 메일이었다.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면접 몇 번 통과하면 공짜로 암스테르담 관광 할 수 있겠네!”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최종면접을 위해 암스테르담행을 눈앞에 두니, 욕심이 생겼고 갑자기 절실해졌다. 준비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최종 합격을 했다. 

외국에서 일하며 산다는 것

2017년 7월 말, 무척 더웠던 한국을 떠나 도착한 네덜란드는 생각보다 추웠다. 햇빛보다는 비와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환경의 변화 때문일까? 아이는 오자마자 고열로 며칠 동안 고생했다. 신고식을 하는 느낌이었다.

2주간의 서류 처리 및 적응기간을 거치고 8월에 입사를 했다. 수십개국에서 온 동료들과 영어로 일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솔직히 첫 6개월은 언어와 문화 차이로 인해 고생을 많이 했다. 한국에서 영어로 종종 업무를 하곤 했지만, 하루 종일 영어로 일하는 환경은 처음이었다. 또한, 직설적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람들과 일하는 것도 처음엔 힘들었다. 오해를 많이 했다. 1:1 미팅 중에 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그들의 어법이 문화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한국 내에서 이직만 해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스트레스가 크다고 하는데, 나는 이직과 함께 이민을 한 경우이다. 모든 고등교육과 직장생활을 한국에서 하다가 유럽으로 바로 넘어온 케이스이기 때문에 업무 및 생활이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날씨 또한 예상외의 복병이었다. 부슬비가 계속 오고, 바람이 세며, 오후 4시부터 어두워진다. 이런 날씨가 4~5개월 동안 이어진다. 날씨 때문에 이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국인들도 많다.  

반면 내가 네덜란드에 바랐던 점들은 확실히 보장받았다. 우선 미세먼지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고, 개인/가족의 삶을 존중하는 문화답게 업무시간은 유연했다. 야근은 1년 반 동안 해본 적이 없고, 퇴근 후 업무 때문에 연락받은 적도 없다. 또한,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 세계 1위인만큼, 내 아이도 나중에 좋아하는 일 하면서 행복하게 자랐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다. 

이곳에서 언제까지 일 할 수 있을까?

이제 이직 후 1년 반 정도가 지나고 두번째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솔직히 이직 초기에는 업무 적응을 위해 가끔 밤에 업무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젠 집에서까지 일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업무에 익숙해진 것도 있지만, 회사에서 나한테 그 정도까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상사도 나를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압박하지 않는다. 아이의 방학이나 휴학 등 가족 일이 있을 경우는 눈치보지 않고 가족 일을 우선 챙길 수 있고, 내 업무의 양과 속도는 내가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성격의 고민을 한다. 바로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이다. ‘유리천장'이 있다는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회사의 고위 관리자 및 임원급 자리는 네덜란드인(특히 백인)의 비중이 높다. 다른 로컬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 회사이기 때문에 당연할 수 있고, 벌써부터 이른 걱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만약 다른 나라로 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면, 아직 30대인 지금 가야 하는 것 아닐까?”와 같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좀 더 행복하기 위해 이민을 왔고, 환경도 나름 괜찮은데, 나는 왜 이런 고민을 할까? 어쩌면 내가 아직도 열심히, 경쟁적으로 일하는 한국인의 피가 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사람들 중에도 밤낮없이 일해서 성공과 부를 성취하려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일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다. 고소득일수록 세율이 엄청나게 높고(2018년 기준 연 소득 68,507 유로, 한화로 대략 8,700만원, 이상인 경우 소득세율 51.75%[링크]), 저소득 계층에 대한 교육 및 주거 등의 지원이 좋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좀 더 이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까?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이제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몇 년 후에는 내가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며 나이가 들고 있을 지 궁금하다.